시네마베리테 2

<다음 세계를 위하여>를 '이다음의 세계를 위하여'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1963, 피에르 페로, 미셸 브로)를 보고 왔다. 오래 전부터 이 작품을 향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이다음의 세계를 위하여’나 ‘세계의 이다음을 위하여’라고 불러 왔다. 제목의 맥락을 잘 살리고 싶어서.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굳이 이렇게 하지 않을 듯하다. 실망이 컸다. 다큐멘터리 영화사의 일반적인 접근에서 이 작품은 다이렉트 시네마로 분류된다. 캐나다 NFB의 다이렉트 시네마 군이라는 분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이렉트 시네마라기 보다는 민속지적 작품이다. 에스노픽션이라고 하는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로버트 플레허티의 다큐멘터리와 훨씬 가까워 보였다. 다이렉트 시네마나 에스노픽션의 입각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비평적인 맥락도 그리 엿보이지 않는다...

단상들 2023.11.13

“양식(style)이 진실(truth)을 보장한다는 미친 생각이 있다” - 에롤 모리스

다큐멘터리 구성론을 검토하면서 (1988, 에롤 모리스)을 들춰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구성론에 관한 선행 연구는 이미 인문사회 분과에서 충분히 이루어졌지만 그 논의가 진영에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카메라를 향한 낭만 탓일까? 지식인들의 게으름 탓일까? 은 당시 유명한 형사 사건 판결에 영향을 줌으로써 큰 대중적 관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재연을 끌어들임으로써 모종의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 화제작이다. 또한 전후 세계를 지나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 때쯤 다큐멘터리 영화가 진실을 담보하는가에 관한 담론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는데 은 그에 관한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카메라는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物을 찍는다는 어리석은 판타지 때문에 아주 오..

단상들 2023.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