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들 16

<노 베어스>(2022, 자파르 파나히) 읽기

기초 정보 감독 자파르 파나히 جعفر پناهی, Jafar Panahi 출연 자파르 파나히, 미나 카바니, 바히드 모바셰리 Synopsis 이란에서 출국금지 당한 영화 감독 자파르 파나히. 그는 한 국경 마을에 머물며 원격으로 영화 촬영을 진행한다. 그가 찍는 영화 속에는 터키에서 프랑스로 도피하려는 커플이 등장하고 그가 머무는 마을에는 오랜 관습으로 사랑을 허락받지 못한 연인들이 도피를 계획 중이다. Note 감독이 현실과 영화, 다큐멘터리와 픽션, 진실과 허구 등의 해묵은 구도를 진부한 방식으로 꺼내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첫 쇼트와 두 번째 쇼트의 경계선을 보면서 진부하다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둘 간의 경계..

단서들 2024.02.07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더 드리머>

요 며칠 부산에 갈 일이 있어 영화제에도 들렀다. 에리세의 신작이 있었지만 예매할 수 있을 리 만무. 들를 수 있는 시간에 예매 가능한 작품을 둘러보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클립을 보았다. 히치콕에 능통한 누벨바그 감독들 중 누군가가 90년대에 연출한 작품의 클립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장면이었다. 이 정도로 빽빽한 데쿠파주를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턱을 들고 스크린을 올려다 봐야 하는 좌석에서 영화를 봐야 했다. 명색이 영화의 전당이고 시네마테크인데 상영관 설계를 왜 이렇게 했을까… 싶은 자리였다. 반면 영화는 대단히 놀라웠다. 빽빽한 데쿠파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졌다. 게다가 놀라운 건 정교한 데쿠파주 뿐만이 아니었다. 문예적, 영화적 그리고..

단서들 2023.10.13

제15회 서울건축영화제 상영작: 리컨버전

톰 앤더슨(Thom Andersen)의 2012년 작 이 제15회 서울건축영화제에서 상영한다. 포르투갈 건축가 에두아르도 소투 드 모라(Eduardo Souto de Moura)의 작업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2013년에 보고 꽤나 인상 깊었는데 오랫동안 다시 볼 수 있는 기회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건축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 네이버TV에서 서울건축영화제 채널을 구독하면 9/17일(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건축에 관한 작품이지만 건축에 관해서도, 소투 드 모라에 관해서도 그리 아는 바가 없었기에 나는 소투 드 모라의 건축보다는 그것을 조명하는 시각과 영화에 관한 메타포들이 더 흥미로웠다. 이에 관해 두드러지는 지점들은 시간, 물성,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등을 들 수 있다(오래전에 보..

단서들 2023.09.14

트린 민하의 <재집합>(1982) 도입부

영화가 시작되면 기존의 민속지적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나열되는 가운데 ‘저개발’이라는 입각점으로부터 물러서고자 한다는 음성 내레이션이 제시된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이 말은 이 무엇을 재현할 것인지 넌지시 말해준다. The Casamance. Sun and palms. The part of Senegal... 바로 트린 민-하가 세네갈에서 가진 심상적 편린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적인 몽타주가 이어지고, Reality is delicate. My irreality and imagination are otherwise dull. The habit of imposing a meaning to every single sign. 라는 내레이션을 기점으로 모종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오르가논 전복..

단서들 2023.07.24

게임이론의 구도를 이용하는 <다크 나이트>의 딜레마

의 메인 테마는 dilemma다. 갈등 구도도 딜레마를 취하고 있으며 극 중 가장 크게 달라지는 인물도 2 Face 하비 덴트다. 의 첫 번째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폭력을 사용하는 배트맨은 권력을 위임받지 않았지만 공권력보다 더 치안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배트맨의 활동은 마땅한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나? 고담시민들은 배트맨을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이때 조커는 기성 질서의 균열을 파고든다. 배트맨과 경찰, 고담시민들을 상대로 '게임'을 벌인다. 사람들을 혼돈에 몰아넣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해괴하고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도록 부추긴다. I believe 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 stranger.

단서들 2023.05.02

<싸이코>의 목소리

에서 가장 잔상이 강한 이미지는 눈이다. 매리언의 눈. 그 유명한 샤워실 장면도 매리언의 눈으로 끝난다. 매리언을 훔쳐보는 노먼의 눈 역시 싸이코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리고 눈과 맞물려 설정된 것이 거울이다. 눈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은 거울이 비추는 어떤 상이다. 거기에는 남몰래 숨겨둔 비밀이 있다. 거울은 탐닉하고 싶으면서도 부정하게 되는 ‘두 개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의 중심 테마인 분열의 요소라 하겠다. 이는 감시의 목소리로 나타나 두 주인공을 — 또는 우리를 — 옥죄어오고 장악한다. 강의를 준비하며 를 다시 보던 중 그동안 지나쳤던 대사의 원문을 체크해보았다. I’ll replace it with her fine soft flesh. * *다층적인 맥락이 묻어 들어 있다: 성적 ..

단서들 2023.04.14

고전에의 향수 <얼라이드>

(1942, 마이클 커티즈)를 강의하는 김에 미뤄두었던 (2017, 로버트 저메키스)를 보았다. 개봉작에 흥미가 생기는 일이 흔치 않은 편이라 개봉 시기에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러지 못했다. 에 관심이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스파이물이라는 점이었는데 심지어 그것이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의 비주얼 컨셉을 취하고 있어 자극이 꽤나 컸다. 의 가장 큰 기술적 장점은 서스펜스 구축이 촘촘하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에 더해 부수적인 재미로는 고전 작품들을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시작하자마자 펼쳐지는 인용은 특히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인용은 72시간 국면이 펼쳐지기 직전의 인용이었다. 맥스와 마리안의 첫째 임무는 느슨하게 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의 ‘1장’ 무대가 19..

단서들 2023.04.04

여성 버디 무비의 대표작 <델마와 루이스>

(1991, 리들리 스콧)를 다시 보고 있다. 대략 20년 만에 다시 들춰 본다. 횟 수로는 두 번째 감상 — 세 번째일지도 모르겠다 — 이지만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주 강의 중 를 다시 들춰보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의 유형을 흔히 버디 무비(buddy movie)라 한다. 버디 무비는 로드 무비(road movie)의 한 유형이다. 로드 무비의 원형은 고대 희랍의 『오뒷세이아』다. 이는 변증법적 모험의 이야기로 주인공의 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지금의 나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본래적 나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는 또한 여성 버디 무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흔히 버디 무비의 출발점을 (19..

단서들 2023.03.20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용납하기 어려운 까닭

몇 차례 둘러본 바에 따르면 (2000, 아녜스 바르다)에 관한 논평은 90% 이상이 ‘인상 비평’이다. 연구 논문은 사실상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 이유가 뭘까? 크게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규모 있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이 텍스트로서 분석적으로 접근해볼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좋아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점은 아녜스 바르다가 에서 생존을 위한 ‘이삭줍기’와 자신의 비디오 촬영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비디오 촬영을 위해 열람하고 있지 않은 그림을 미술관 직원들이 밖으로 꺼내 와 들고 있는 모습은 …

단서들 2023.02.18

<바바라>가 시작하자마자 바바라를 알게 된다

인트로. 열 컷 정도만에 1차 인물 소개를 마친다. 영화관 좌석에 앉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나중에 세어보니 정말 열 컷 정도였다. 존 포드에게서나 혹은 존 포드 시대에서나 가능할 법한 걸 동시대 영화에 볼 줄이야. 바로 떠오르는 비교군이 였지만 만 하더라도 장르적 원용에 기대고 있지 않나. 도 무성영화의 방식을 취하고.

단서들 2023.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