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희랍어 martys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박해 끝에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성화 중에는 이러한 순교자를 그린 그림들이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성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도 그 중 하나다. 세바스티아노는 로마 근위대 소속 장교였으며 일설에는 고위 장교를 맡기도 했다고. 세바스티아노가 언제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의 신앙이 발각된 건 군대에서 꽤 높은 직급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노(Diocleziano)는 세바스티아노에게 기독교 신앙을 버릴 것을 명령한다. 세바스티아노는 응하지 않고 황제는 화살 처형을 내린다.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는 이 처형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세바스티아노가 기둥에 묶여있는데 이는 로마풍의 건물이라고. 이 로마풍의 건물은 잔해와 다를 바 없이 부서져 있고, 그 뒤편에는 예루살렘으로 여겨지는 도시와 그리로 향하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세바스티아노 발밑의 부서진 동상은 대개 니케(Nike) 상으로 보는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들은 일반적으로 이교도를 향한 기독교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양식적으로는 남성의 반나체, 그의 내적 격정을 드러내면서도 균형감을 갖춘 자세(contrapposto), 건물 묘사 등은 고대의 양식을 차용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흔히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콰트로첸토 회화의 면모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 설명 없이 이 이미지만 보고 위와 같은 층위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알아차릴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설이 필요하다. 그림을 뒷받침하고 있는 맥락들을 알려줘야 그림의 정체와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이미지의 위력이란 이러한 맥락 전달을 바탕에 두고 성립한다.
이미지는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치명적인 맹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이미지의 예술이라는 속설이 있는데 이것이 참이라면, 영화가 온전한 의미에서의 이미지의 예술일 수 있으려면 이미지만으로 일상적 의사 소통 수준의 의미나 맥락 교환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누구나 공공 장소에서 손쉽게 수행하고 있지만, 직업 평론가가 되는 데에도 공식적인 검증 과정 같은 건 없지만, 사실 영화 읽기는 영화 예술의 구성 체계, 양식 유형 … 인문예술 공통 교양 등의 기초 지식(core knowledge)을 학습하고 텍스트 읽기와 관련된 훈련을 거쳐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기반 없이 영화를 읽는 건 위에서 언급한 사전 지식 없이 <성 세바스티아노>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
흥미로운 건 ‘자신이 보고 느낀 바나 생각한 바부터 쓰라’는 게 영화 평론의 일반 지침처럼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직업 평론가들조차 입문자들에게 그렇게 권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하는 일이 기초 체계도 없고 합리적인 학습 및 수련 과정이 없다는 걸, 간단히 말해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자인하는 셈인데 이게 버젓이 제시되고 있다는 게 이래저래 좀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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